2013년 12월 24일 화요일

늦은 여름의 이천 테르메덴 온천수영장으로


 저희는 이천 테르메덴 온천수영장가기 전 점심을 먹으려 식당에 들어왔답니다. 
 일죽쪽에 두향에 갔더니 콩물을 먼저 주셨답니다~!!!

 현웅이는 참~!!! 먹을 땐 양반이야~!!! ^^


 반찬이 많죠~!!!
근데 반찬에 비해 가격은 싼편이랍니다~!!! ^^
이제는 먹어볼까나~!!!! ^^

 상은이 벌써 다먹었어?? ^^

 용수야~!!! 먹을만 해??
 영근이도 잘먹네~!!! ^^

 현웅이 왈~!!! "한뚝배기하실래애~!!! ^^

↓ 여기부턴 수영장이라 카메라들고
들어가기 힘들어
핸폰으로 찍었어요~
 수영 후의 즐거운 간식시간~!!!



 얼마나 맛있으면 현웅이가 눈이 풀렸내~!!!! ^^

 영근이 입술이 뭐잡아 먹은 듯~!!! ^^
 먹었으니 또 수영장으로 Let's Go~!!! ^^
 현웅이 가슴가리내~!!!
다 봤는 디~!!!! ^^

 용수랑 상은이 즐거워 하내~!!!! ^^

 수영장에 나오는 물살에 현웅이
재미있는 지~!!!


 용수는 상은이 형아만 졸졸졸~!!!! ^^


 수영과 온천을 즐긴 후 현관에서 한컷~!!! ^^

 평택으로 이동중 휴게소에서 잠시나마~!!!! ^^

 즐거운 저녁시간~!!!! ^^


 이왕 온천도 갔다 왔으니 팩도 한번 하고~!!! ^^

현웅이와 영근이~ 왈~!!!
"왜이러세요?? 우리가 팩한다고 모르줄 아세요??
창피하게...... 이거 초상권 아닌가요?? 우리도 초상권이 있어요~!!!"


저희는 여름동안 캠프도 못가고 그래서
벙개로 이천 테르메덴 온천수영장가기로 했습니다.
오전에는 비가 와 걱정은 했지만
점심을 먹은 후 날씨는 괜찮아졌고,
수영장은 그다지 사람이 많은 편이 아니라
수영대신 물놀이도 재미있게 하고
간식으로 떡볶이와 어묵꼬치(일명 덴부라~!! ^^)먹으며,
지나가는 아줌마인지 아가씨인지 모르겠지만 히긋 쳐다보기도 하고,
(상은아~ 왜그랬어??(솔직히 제 이야기~!!!)),
약간의 썰렁하면 온천장으로 번갈아 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답니다~!!!

다음 가을에는 남이섬으로 가려고 생각중이랍니다~!!!! ^^

2013년 11월 11일 월요일

상처뿐인 해방-일본의 패전과 한국


1945년 8월 15일 정오, 대일본제국의 천황 히로히토는 라디오를 통해 전 세계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선포했다. 이 항복선언은 이미 8월14일 오전 11시에 녹음되었다가 하루가 지난 뒤 라디오를 통해 발표된 것이다. 이미 두 차례의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일본의 패전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후항전을 준비하고 있던 수많은 군인들에게 이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선언이었다. 그 날 천황의 항복선언을 자신의 불충 탓으로 여긴 수많은 일본인들이 혹은 배를 가르거나 혹은 권총의 방아쇠를 당겨 자결했다. 그 수는 5천여 명에 달했다. 

일본열도와 전 세계의 일본인들이 이처럼 망국의 비탄에 젖어 있을 때,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과 일본군 점령지에서는 일제히 환호의 축포가 울려 퍼졌다. 조선반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집안에 감추어둔 태극기를 꺼내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기쁨의 만세를 불렀다. 그 날의 표정을 전후 세대들은 잘 알기 힘들지만, 그것은 아마도 지난 6월 25일 월드컵 8강전에서 한국팀이 승리하고 난 뒤의 분위기와 비슷했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실로 믿기지 않은 사건에 모두들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했으며, 그 날의 축제는 며칠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것이다.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한 10일 뒤인 1945년 7월 26일,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은 독일 베를린 근교의 포츠담에서 만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또한 포츠담 선언에서는 소련의 신속한 대일 개전을 촉구하고 제8항에서 무조건 항복 이후 ‘일본의 영토는 4대 섬과 부속도서로 제한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의 문제가 처음 거론된 것은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회담이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 소련의 스탈린 서기장은 1945년 2월4일부터 11일까지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회동하여 독일의 전후처리와 소련의 대일 개전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미국과 영국은 소련의 극동전선 참전을 촉구하였고 결국 소련은 몽골의 현상유지, 사할린과 쿠릴열도, 여순의 소련 귀속, 대련의 자유항화, 만주철도의 중소 공동운영, 만주에 대한 중국의 주권보장 등의 조건에 합의하고 대일 개전을 결의하게 되었다. 이 회담에서 루즈벨트는 비공식적으로 조선반도에 대해 미중소 3개국에 의한 20년 내지 30년 정도의 신탁통치를 제안하였는데, 이에 대해 스탈린은 신탁통치에 동의 하지만 기간은 더 짧아야 하며 외국군대의 주둔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후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외무장관 회담에서는 조선에 대한 임시정부 수립과 5년간의 신탁통치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선반도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의 선동으로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시위가 조직되었다. 초기 반탁시위는 좌우익 합작으로 진행되었으나 좌익은 곧 찬탁으로 입장을 선회하였다. 이때부터 좌우익, 찬탁파와 반탁파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조선에서 좌우익의 대립은 미소의 대립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조선의 신탁통치 문제는 냉전 대결이 격화되면서 결국 1947년 9월 폐기되고 말았다. 

이후 유엔총회는 조선에 대해 자유총선거를 실시해 정부를 구성한다는 결의를 했는데, 이에 따라 선거를 감시할 위원회가 파견되었으나 38도선 이북으로는 접근하지 못했다. 이때 미군정의 대리인 이승만은 ‘정읍선언’을 통해 가능한 지역에서만 총선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김구 등 통합 우선주의자들의 반발을 샀다. 어쨌든 이 선언 이후 남북은 각각 분단상태에서 정부를 구성하는 절차를 시작함으로써 분단이 고착되었다. 

이 같은 논의들은 별 중요성을 가진다 할 수 없다. 전후 조선의 처리 문제에서 중요한 점은 연합국들이 1868년 이후 취득된 일본의 영토를 몰수한다는 합의를 했다는 것인데, 이는 전후 국경설정에서 독일은 물론 다른 국가들도 전쟁 직전의 국경선으로 회귀한 것과 비교해보면 일본에 대해서는 매우 차별적인 조치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80년 전의 국경선으로 회귀한다는 결정은 아무리 패전국이라지만 국제적인 전후처리 관행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먼저 북해도를 점령했고 이후 오키나와 등 일본열도 남단의 섬들을 점령했으며, 대만, 사할린과 쿠릴열도, 조선반도, 만주 등을 통합하여 일본의 영토는 점차 확대되어 왔다. 오키나와에 대해서는 패전 이후 괌, 사이판과 같은 미국령으로 유지되어 왔으나 미국은 1976년 오키나와를 반환하였으며 북해도는 처음부터 분단시키지 않았다. 

1931년 이후 사실상 일본의 영토가 된 만주에 대해서는 이미 국제연합에서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패전 이후 일본은 만주를 비롯해 1930년대 이후 취득한 해외 영토를 포기하는 데 별다른 이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국제적으로 승인 받고 정당한 절차에 의해 일본 영토에 통합된 오키나와를 비롯해 대만과 사할린, 조선, 쿠릴열도, 남양군도(마이크로네시아) 등의 영토에 대해서는 패전을 이유로 이들을 일본으로부터 분단시킨다는 발상은 정당성이 결여된 조치로서, 약자를 무시하는 승전국들의 또 다른 침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연합국과의 합의에 따라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일-소 불가침조약을 스스로 폐기하였다. 유럽에서 극동지역으로 이동한 소련군은 1945년 8월9일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을 시작했다. 우세한 소련군의 화력 앞에서 일본의 극동군은 차례로 궤멸하였으며, 소련군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뒤에도 계속 진격하여 8월26일에는 조선반도 북부의 평양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8월 10일 미국과 소련은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각각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기로 약속한 상태였으므로, 소련군은 38선에서 진격을 멈추었다. 1945년 9월 8일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 제24군단이 인천에 상륙했으며 9일에는 서울로 들어와 조선총독부를 점령하였고 곧이어 북위 38도선 이남 지역에 대한 군정을 시작했다. 

인민은 약하므로 언제나 승리자의 편이다. 오랜 세월동안 일본에 동화되어 일본인으로 살아왔던 조선인들은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마치 자신들이 일본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행세하기 시작했으며, 이 같은 추세는 전염병처럼 번져나가 곧 모든 사람들이 숨겨진 항일투사로서 일본의 통치에 저항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세상이 바뀐’ 것이다. 곧이어 소련군과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을 시작하자 조선인들은 소련국기와 성조기(미국의 국기)를 들고 나와 이들을 환영하였으나, 이들 승전국의 군대는 총알세례와 약탈, 강간으로 화답하였다. 

열도에 진주한 미군과는 달리 조선반도를 점령한 소련군과 미군은 대륙에 붙어있는 일본 영토를 점령하고 일본군을 무장해제하는 사명을 띠고 있었으므로, 대단히 잔혹하고 야만적이었다. 그들은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할 수 없었으며, 이곳이 조선이라는 인식도 없었다. 그들에게 조선반도는 단지 일본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승리에 대한 도취감으로 곧 복수를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건물을 파괴했고 부녀자를 강간했다. 특히 북한 지역에서는 소련군의 약탈과 강간이 빈번했던 탓에 여자들은 바깥출입을 하지 않게 되었으며, 길거리에 여자가 사라지자 소련군은 가택수색을 하여 강간을 하였다. 이때 조선인들은 고쟁이라는 것을 만들어 여자들에게 입히게 되었는데, 이는 치마 안쪽에 입는 짧은 바지로서 요즘의 거들과 같은 의복이다. 하지만 고쟁이도 집안까지 쳐들어와 어린 여자들을 겁탈하는 점령군의 강간을 막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후 한반도는 공산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에 의해 체제경쟁의 전시장으로 변해갔다. 남한과 북한의 정권을 장악한 미,소의 대리인들은 정권을 유지하고 그들의 종주국으로부터 환심을 사기 위해 경쟁 체제에 대한 극단적인 적개심을 갖도록 인민을 세뇌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50년 이후 3년간 참혹한 전쟁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본격적인 전쟁이 있기 이전에도 남한은 사실상 좌우익의 전쟁터였다. 이념대립으로 인해 수많은 대량 학살사건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수십만명의 선량한 주민들이 죽어갔다. 


[ 반일 세력의 정권 장악 ]
전후 한반도는 독일과 함께 이데올로기 대립의 상징으로 육성되었지만 남북 모두 반일세력에 의해 정권이 장악되었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었다. 남한에서는 정부 수립 이후 반공이 가장 중요한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했는데, 동시에 반일도 그에 못지 않은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종전 이전 이들 독립운동 세력은 주로 해외에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을 업으로 삼아 생활했던 일종의 ‘독립업자’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그 중에는 일부 독립이 조선민족에게 지고의 선이라고 믿고 헌신한 지식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독립운동을 명분으로 삼아 일하지 않고 살아가거나 인민의 재산을 노략질했던 룸펜, 혹은 도적떼에 가까운 집단이었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쫓기거나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만 하면 모두 독립운동가로 행세할 수 있었던 당시 시대상황을 잘 이용하였기 때문에 도적떼와 독립군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았다. 

남조선에서는 정부수립 이후 이 독립운동 룸펜 집단이 귀국해 정권을 장악한 뒤 친일파를 탄압했다. 이 때문에 남조선에서는 누구나 일제시대에 총독부에 저항하거나 최소한 협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분위기가 점차 강화되면서 반일은 한국의 중요한 통치이데올로기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일본통치 시대의 모든 제도적 인적 유산을 청산해버린 북조선과 달리 한국을 점령한 미군정은 일본통치의 유산을 활용하려 하였기 때문에, 정부수립 이후에도 친일파들은 반공운동에 적극 협력하는 전략을 선택함으로써 한국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일본통치 기간 중 일본은 대륙과 가까운 북조선 지역을 주요 산업기지로 육성했다. 이 때문에 북조선은 종전 이후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출발하여 30년 동안 남한에 대한 국력의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한은 일본통치의 유산 가운데 많은 부분을 계승하였고 또한 1965년 뒤늦게나마 일본과 국교를 수립함으로서 많은 경제적인 지원을 받은 탓에 1970년대 이후 체제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 패전의 가장 큰 피해자 ]
그러나 돌이켜보면,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국이 됨으로써 가장 큰 피해자가 된 것은 현재의 일본인들이 아니라 한반도에 살고 있던 조선민족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오늘날 전제적인 독재체제 아래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북조선은 조선 민족 가운데서도 패전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하겠다. 종전 당시 조선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동북아시아 지역의 광범위한 지역으로 흩어졌다. 이들은 주요 5개의 그룹으로 구분되는데, 남조선주민, 북조선주민, 재일 조선인, 중국의 조선족, 소련의 까레이스키(Corean의 러시아어 발음) 등이다. 

종전 이후의 삶을 돌이켜보면 이 가운데 일본에 남아있던 조선인들이 가장 사정이 나았고, 그 다음으로는 남조선 주민, 중국의 조선족, 러시아의 까레이스키, 북조선 주민의 순으로 불행한 삶을 영위했다. 이는 오늘날 역사를 돌이켜 일본이 패전하지 않았거나 혹은 패전 이후에라도 조선이 일본과 분단되지 않았을 경우를 가정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전후 한국인들은 일본통치 시대 모든 조선인들이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고 우리는 전쟁을 통해 스스로 독립을 이루었다고 조작된 역사를 학습했다. 그 결과 많은 한국인들에게 일본통치 시대는 그저 잠시 강대한 침략자에게 눌려있던 기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분단된 것이 민족의 미래에 얼마나 엄청난 불행을 가져왔는지, 혹은 아직 남북한이 일본의 일부였다면 지금보다 얼마나 더 발전된 나라가 되었을 것인지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올해 2002년 초 개봉된 한일합작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젊은 세대들에게 그동안 생각지 못했던 시각에서 한일관계를 조명할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나는 금년 초 어느 모임에서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행복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20대 여성을 만난 적이 있는데, 아마도 이 영화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인들 사이에서 이같은 아이디어를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복거일이라는 한국인 소설가의 1987년작 <비명을 찾아서>라는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인데, 시대 설정이 다소 참신할 뿐 소설 자체의 스토리는 유치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이 소설은 어느 일본인이 조선북부에서 과거로 여행할 수 있는 유물을 발견한 뒤 그것을 이용해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이토의 암살을 저지함으로써 역사가 바뀌게 된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그 결과 일본은 2차 대전에서 승전국이 되고 2009년 서울은 일본의 제3대 도시로서 찬란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군 不令鮮人들이 이 보물을 되찾아 다시 역사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한국은 독립을 이루게 된다는 스토리다. 이 영화는 올해 초 한국에서 많은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아직 우리가 일본이라면..’ 이라는 다소 획기적인 발상이 생겨난 것은 어디까지나 이 영화의 영향이라고 하겠다. 

2002년 초, 당시 한국의 경제 부총리인 진념씨는 수십년동안 혼란 속에 있는 교육제도에 관해 언급하면서, “한국의 교육제도는 아직 일제시대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해 이를 두고 소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일제시대가 지옥과도 같았고 해방 후에는 힘들긴 했지만 최소한 일제시대보다는 나은 조건에서 출발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의 전후세대들에게 전전세대인 진념씨의 발언은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교육제도 뿐 아니라 관료시스템 전체가 아직 일제시대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최근 이루어진 합병 초기 조선토지조사사업에 관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당시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총독부의 <임시토지조사국>에 의해 8년 동안 실시된 방대한 조사사업 기간동안 농촌주민들이 물리적으로 저항한 사례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연구자들은 “이 작업을 수행한 총독부의 관료들은 실지조사實地調査나 분쟁지 처리에서 엄정한 공정성에 입각해 깨끗하고 강력하며 효율적으로 임했다”고 총독부 관료들의 청렴과 봉사정신을 극찬하고 있다. 관료들의 이같은 공무집행의 자세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눈씻고 찾아봐도 발견하기 힘든 것일 뿐 아니라, 오늘날 한국에서 그토록 엄청난 이권이 결부된 작업을 소수의 공무원들에게 맡겨 놓는다면 시비와 분쟁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고 아마도 8년이 아니라 80년이 지나도 마무리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김영삼 정부는 지난 1993년 서울-부산을 잇는 경부고속철도 건설사업을 시작하면서, 건설비 5조원으로 2001년까지 완공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뀐 뒤 조사해본 결과 5년 동안 공사는 거의 진행된 것이 없고 사업비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이 사업은 다시 총 사업비 19조원으로 2010년 완공하는 것으로 수정되었으나, 그나마 이마저도 절반의 노선은 기존 철로를 보수해 사용하는 등 원래의 계획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수정된 계획도 그대로 진행될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인가. 그동안의 계획은 정부 관료들이 국민의 세금을 도둑질하기 위해 거짓으로 계획을 작성해 국회의 승인을 받은 뒤, 엄청난 뇌물을 받고 부실한 업체들에 시공을 맡겨 낭비해버린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부패한 관료제도는 국가운영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낭비와 비능률을 초래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적인 연구기관들에 따르면 한국의 관료제도는 제3세계 국가치고는 놀라울만큼 부패가 적고 그것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니, 저개발국이 스스로의 관료 시스템에 의존해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과제인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은 이처럼 아직 교육제도와 관료시스템 등에서는 일제시대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으나, 경제구조 등에 있어서는 이미 일본통치시대 전성기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이다. 산업구조 면에서 보면 1940년대 초반 조선 지역은 농업생산 43%, 광공업생산 25%, 기타 32%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무역의존도는 69% 였다. 이 당시 조선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공업국으로 변모해 있었으며 세계 최고 수준의 무역의존도를 가진 ‘수출지향 경제발전’ 전략이 추진되고 있었다. 이같은 산업구조와 무역의존도에 기초해 고찰해볼 때, 남한 경제가 1940년대 초반의 수준을 회복한 것은 아마도 1980년대 초반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이 문제는 차후 보다 더 깊은 조사연구가 필요할 것이나 현재로서는 그 정도로 유추할 수 있다. 

1950년대 말에 이미 1940년대 초반의 경제력을 회복한 일본과 비교해볼 때, 이는 25년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구일본제국의 외지 가운데 대만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우등생인 남한이 무슨 이유로 40년이 지난 다음에야 일제시대의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인가. 전쟁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었던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이니 전쟁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론은 자명하다. 종전당시 조선에는 약 70만 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후 승전국들의 결정에 따라 조선에 있는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채 일본으로 추방되었다. 이들은 합병 이후 일본에서 이주한 공무원, 교사, 경찰, 사업가, 농민, 노동자, 기술자로서 대부분 우수한 인력이었다. 즉 낙후된 조선은 40년 동안 이들의 힘에 의해 고도성장을 지속하며 수출형 공업국으로 발전하였으나, 패전 이후 이들이 한꺼번에 추방당하고 그 자리를 해외에서 귀국한 소위 ‘독립운동가’ 룸펜 집단이 차지하는 지배층의 교체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조선은 다시 수십년 전의 사회로 후퇴하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조선은 1940년대 초 국내 총생산의 69%라는 경이적인 무역의존 체질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물론 대부분 내지(일본)와의 무역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정부수립 이후 청구권 문제로 20년 동안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절대적인 수출시장을 상실하고 말았다. 오늘날 한해 3500억 달러의 교역을 하는 한국경제가 어느 날 갑자기 교역액이 350억 달러로 줄어든다면 파멸상태가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일본의 패전 이후 모국을 잃어버린 남한 경제는 이처럼 비참한 파멸을 경험했던 것이다. 


[ 해방인가 ]
이같은 고찰에 기초해 볼 때, 한국인들이 종전을 ‘해방’이라고 말하고 8월 15일을 빛을 다시 찾은 날이라는 뜻의 ‘광복절’로 경축하는 것은 실소를 자아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해방’으로 인해 우리는 과연 자유를 찾고 행복했는가? 그 날 이후 조선인들에게는 분단과 좌우대립, 끝없는 학살과 전쟁, 배고픔과 눈물만이 있었을 뿐이다. 부유하고 헌신적인 부모의 보호 아래 행복하게 자라던 어린이가 채 성장하기도 전에 고아 신세로 전락해버린 것이 전후 한국의 모습이다. 돌이켜보면 그 기나긴 지옥 같은 세월을 견디고 오늘을 이루어낸 한국인들이 경이로운 존재로 여겨질 정도이다.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한국이 얻은 것은 분단과 고통, 기아와 죽음뿐이었다. 잃은 것은 70만의 일본인과 수출시장, 그리고 무엇보다 고귀한 자유와 존엄이었다. 오늘날 한국에는 18,000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다.

쇼비니즘의 광풍을 뚫고

조선과 대만은 100년 전 근대화가 시작되는 중요한 기간에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날 두 나라가 일본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대만은 정부와 민간 모두 일본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반면, 한국은 지속적인 반일교육의 영향으로 정부나 민간 차원 모두 일본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양국이 비슷한 기간동안 비슷한 성격의 일본 통치를 거쳤음에도 이 같은 차이가 발생한 까닭을 물어보면, 대체로 대만에 대한 일본통치가 조선에 비해 15년 더 길었다는 것과 대만에는 일본 이전에 독자적인 왕조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대답을 쉽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남북한이 보이고 있는 일본에 대한 유별난 적대적인 태도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북한의 경우 오랫동안 항일 독립운동의 전설로 알려진 조선혁명군 세력이 집권했기 때문에 반일정책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독립 이후 친일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남한에서는 왜 이토록 반일감정이 심각한 것인가.

보통의 한국인들이 지닌 반일감정의 기저에는 과거 일제통치 기간동안 조선이 많은 손해를 입었다는 피해의식이 깔려 있는 듯한데, 같은 기간 동안 일본인들은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처럼 같은 일에 대해 지니고 있는 지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깊은 감정의 골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한국인 사이에 퍼져있는 반일감정의 근원에는 먼저 역사학자들에 의한 자의적인 자료 조작과 왜곡이 자리하고 있고, 이에 근거한 강력한 반일 교육과 이데올로기 책동이 깔려 있다.

1905년 이후 일본에게 있어 조선은 식민지라기보다는 확장된 일본의 영토라는 의미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과 대만을 통치함에 있어 대체로 본토인과 같은 대우를 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조선에 대해서는 대륙에 연결되어 있다는 지정학적인 중요성 때문에 오히려 본토보다 더 많은 투자와 산업시설을 유치하는 등 유리한 대우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유럽 열강들에게 식민지라는 것이 멀리 떨어진 곳에 농장을 소유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었다면 일본에 있어 조선과 대만은 옆의 점포를 사들여 가게를 확장하는 것과 비슷한 행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의 반일감정은 이 점에 대한 오해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듯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서울에 거주하면서 멀리 떨어진 호주나 뉴질랜드에 농장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는 현지에 일정한 돈을 투자해 수익을 발생시킴으로써 그 과실을 따먹는 일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거주지이자 일터인 상점을 경영하는 가난한 상인이 힘들게 옆에 있는 가게를 인수하게 되었다면, 그는 열성을 다해 새로 생긴 가게를 단장하고 기존 점포와 통합해 시너지 효과를 얻는 일에 주력할 것이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 대만과 조선을 합병한 일본의 처지는 바로 이런 구멍가게 주인과 비슷했다고 하겠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을 개발하고 발전시킨 일을 두고 돼지를 키워 잡아먹기 위한 것이었다거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하면서 우리 스스로 그 의미를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개발하는 데 있어 혹 장기적인 수탈이나 병참기지 확보하는 목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며, 조선에 와서 힘들게 농토를 개량하고 사업을 일으킨 일본인들 가운데에는 조선에 근대문명을 전파하고 조선을 신속히 개발하여 일본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동화하겠다는 좋은 의도를 지닌 사람들도 많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과거 일본이 조선에 행한 선의의 시혜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는 일은 사라질 것이다. 즉 한국인들에게 존재하는 반일감정은 한국 정부의 의도적인 역사왜곡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라고 생각하며, 이는 또한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우리는 왜곡된 교육으로 인해 흔히 을사조약과 한일합병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이와 전혀 다르다. 일본과 합병하는 것만이 조선의 문명개화 및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방안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당시 조선의 뜻 있는 개혁세력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도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같은 강력한 여론에 따라 일본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접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가장 유력한 증거가 바로 1904년 결성된 일진회다. 이 단체는 동학과 독립협회가 연합하여 조선 왕조 및 수구 반동세력을 무너뜨리고 일본과 연대하여 문명개화라는 조선혁명의 시대적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 결성된,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인 대중정치조직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은 한국 사회에서 철저히 은폐되어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일진회에 대해 일본이 소수 친일파들을 규합하여 결성한 어용 사이비 단체 정도로 왜곡하여 교육하고 있다.

1904년 초 벌어졌던 러일전쟁에서 동학 교도들은 교주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5만여 명의 병력이 참전하여 일본과 함께 싸웠다. 이후 동학 교도와 보부상들은 진보회를 결성하여 첫해에만 전국에서 38만의 조직원을 확보하였으며, 이후 이름을 일진회(一進會)로 바꾸고 독립협회 계열의 개화인사들과 연합하여 한일 합병과 개화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 때 100만이 넘는 방대한 조직을 갖춘 이들은 스스로 검은 옷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잘라 외모에서 쉽게 구분이 되었기 때문에 보수 반동세력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일진회는 결성 이후 일본과의 합병을 추진하였고 그로 인해 반혁명 세력과의 내전에서 수많은 일진회원들이 살해되고 건물이 파괴되는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오늘날 한국이 일진회를 친일단체라 하여 비난하고 반동 폭도들을 의병이라 칭송하는 것은 역사를 거꾸로 해석하는 실수라 할 것이다.

스스로 을사년 신협약의 체결을 주도하고 조선의 초대 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는 정치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일본에 부담이 되는 조선 합병을 결코 원하지 않았으며 이는 다만 일진회 등 조선의 혁명세력이 청원하던 바였으나, 안중근의 이토 살해사건으로 인해 일본의 여론은 급속히 합병으로 기울게 되었으니 안중근은 그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애국을 한 셈이 되었다. 일진회는 조선 역사상 최대의 혁명 조직이자 군사조직이었으며 조선 총독부조차도 그 힘을 두려워하여 합병 이후 강제 해산하였을 정도로 강력했던 조선의 정치조직이었다.

일본의 통치로 인해 조선은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30년 남짓한 기간동안 천만명도 안되던 인구는 2500만으로 늘었고 평균수명은 24세에서 45세로 늘었으며, 미개한 농업사회이던 조선은 단시일 내에 근대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변모하였다. 본토에서는 우수한 교사들이 부임해 조선인들을 교육하였고 해마다 일본 정부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유입되어 각종 사회기반시설이 건설되었다. 1920년대에는 일본에 대한 쌀 수출로 조선에는 갑부들이 속출하였으며 그 바탕 위에 소위 ‘민족자본’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다. 1920년대 조선의 문예부흥은 일본과 정확히 같은 시기에 시작된 것이며 오늘날 이광수와 최남선으로부터 시작해 김동인 이효석 김영랑 윤동주 홍난파 등 우리가 기억하는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등장한 인물들이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이 같은 공헌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으며, 간혹 인정하는 사람들조차 그것이 일본이라는 외세에 의해 이루어진 타율의 성과물이라는 이유로 그 의미를 평가절하하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조선은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유교 근본주의 사회로서, 그 유교적 계율의 정교함과 엄격함은 오늘날 이슬람 근본주의 따위는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못할 정도라 하겠다. 따라서 오늘날 회교 근본주의가 이슬람 사회에 미치고 있는 악영향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인식이 미치는 사람이라면 조선의 유교근본주의가 외세의 영향이 배제된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소멸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20세기 초 외세에 의한 개혁, 그것도 일제에 의한 철저한 청산 작업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한반도는 전 세계에서 가장 미개한 지역 가운데 하나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제시대가 우리에게 행운이었고 축복이었을지언정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불행한 과거일 수는 없다.

우리는 전후 한반도가 두개의 나라로 분단되었지만 일본은 운 좋게도 분단을 피했다고 생각해왔다. 통일을 말할 때에도 남북한의 통일만을 얘기할 뿐 일본이나 대만과의 통일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패전 후 일본제국이 5개의 지역으로 분할 점령된 것이지 남북한이 분단된 것은 아니다. 승전국들에게 한반도는 일본의 영토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고, 이들은 일본제국을 남한과 북한, 대만, 사할린, 일본열도의 5개 지역으로 분리하여 각각 점령한 것이다. 이 가운데 사할린만이 아직도 러시아의 영토로 되어 있고 나머지 4개 지역은 독립국이 되었다. 일본제국이 메이지 유신 이후 획득한 영토를 분리한다는 것은 승전국들의 논리였지 우리가 선택했던 것은 아니며, 물론 일본이 원했던 것도 아니므로 이는 분명 강제 분단이라 하겠다.

일본은 조선과의 분단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일본은 전후 독립과정에서 사할린과 대만은 포기하더라도 최소한 한반도와는 통일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백방 노력하였지만 힘없는 패전국의 주장은 먹혀들지 않았고 분단은 고정되어 버렸다. 미국과 소련은 각각 남북한을 분할 점령한 뒤 자신들의 꼭두각시를 대리통치인으로 앉혀 위성국가로 삼았다. 그러므로 한반도 분단의 원흉, 더 근원적으로 구일본 분단의 원흉은 멀쩡한 나라를 패전국이라 하여 강제로 갈라놓은 미국 소련인 것이지 분단을 막아보려 애쓴 일본은 아니라 하겠다.

나는 어린 시절 <도라 도라 도라> 라는 전쟁영화를 매우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뭐가 그리 재미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같은 영화를 두어 번은 본 것 같다. 그 영화에서 일본은 하와이의 평화스런 미국인들을 기습 공격한 비겁하고 못된 나라였고, 나는 일본군인들을 저주하면서 제2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미국이 멋지게 일본군을 때려잡을 것이라던 도라도라 2탄은 몇 년을 손꼽아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최근 <진주만>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일본군을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미 60년 전에 엄청난 규모의 항모전단을 이끌고 지구 반대편까지 출정해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박살내버린 일본이라는 나라의 위대함에 나는 감동과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는 우리도 일본이었으며 우리 조상들도 일본인으로서 전쟁에 참가하고 응원했을 것이 분명한데 왜 오늘날 한국인들은 일본과 미국의 전쟁에서 미국을 응원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현실은 일본제국의 영토였던 남한과 일본이 오늘날까지 미국에 점령당하고 있기 때문에 강요당한 멍에일 뿐, 분명 바람직하거나 당연하게 생각할 일은 아닌 것이다.

오늘날 한국 정부에 의해 시행되고 있는 체계적인 반일교육과 그 결과로 생겨난 반일감정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 분단 이후 남한을 장악한 정치집단은 체제유지를 위해 북한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증오집단을 조작해 내었으며, 북한에 대한 증오가 어느 정도 수그러진 오늘날에 와서는 일본에 대한 이데올로기 조작과 반일 책동 작업은 이를 이용하는 세력의 입장에서 그 필요성이 더 커져가고 있다. 그러나 결국 반일 책동은 한국이라는 국가에게 백해무익한 자해행위에 불과하며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의 정당한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쓸어내야 할 구시대의 유산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한국은 전 세계를 통틀어 반일감정이 존재하는 유일한 국가일 것이다. 정작 일본과 전쟁을 치른 미국인들은 일본을 아시아에서 가장 우호적인 국가이자 중요한 경제파트너로 여기고 있으며,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일본에 매우 호의적이다. 또한 과거 51년 간 일제시대를 경험한 대만에서도 반일감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간혹 한국과 한 목소리를 내는 중국의 경우 공식적인 태도는 공산당의 입장일 뿐이며 중국인들에게서 한국에서와 같은 반일감정을 발견하기는 매우 힘들다. 사실 많은 중국인들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며, 한국이나 일본을 중국의 일개 성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몇해전 동아일보와 아사히 신문은 합동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그 결과를 보면 한국인 가운데에는 일본을 싫어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의 3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 일본인들은 한국이 좋다는 응답이 더 많았다. 양국 간의 이런 이상한 감정관계는 국외자가 보기에 첫째, 일본이 한국에 큰 잘못을 저질렀거나 둘째, 한국인들이 비정상적인 반일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두 가지 해석을 낳을 수 있을 것인데, 아마도 두 번째 평가를 내리는 국외자들이 더 많을 것이다.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무례하다는 것은 이미 국제사회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아마도 한국의 유별난 반일감정은 국제사회에서 두고두고 한국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게 될 것이다. 국내에서는 이 같은 분위기를 짐작조차 하기 힘들지만 막상 해외에 나가보면 한국이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우리는 한일관계, 특히 우리가 일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전면적인 반성에 착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작업은 과거사에 대한 냉철한 평가 없이는 성공하기 힘들다. 여기서 나는 개항 이후 한일합병까지의 시기를 조선의 부르주아 혁명기로 설정하고 근대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개항 이후 조선의 당면과제가 부르주아 혁명이었다면 일본은 대체로 혁명의 든든한 지원군이었으며 때로는 주도적으로 개입해 조선의 개혁을 추진한 우호적인 외세로 보았다.

조선의 부르주아 혁명은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을 한 축으로 하고 개화당과 독립협회를 창설했던 지식인 그룹, 동학 민중세력 등 3개의 축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 3대 세력은 시대에 따라 대결하거나 연합하면서 조선혁명을 이끌어왔으며, 한일합병은 그 혁명의 바람직한 귀결이라고 보았다. 이 같은 시각으로 개항기의 조선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혁명은 비록 다소 왜곡된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나 결코 무력하게 외세에 의해 휘둘린 피침의 역사가 아니라 조선 내부 혁명세력의 자주적인 의지로 진행된 주체적인 변혁의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과 조선의 혁명가들은 조선왕실과 그에 빌붙은 수구외세와 대항하면서 30년 동안 끈질기게 부르주아 혁명을 추진했으며, 조선의 문명개화는 이들의 피땀으로 얻어진 성과물인 것이다.

몇해전 여름 한국방송공사에서는 일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두 차례 방영한 바 있는데, 나는 거기에서 오늘날 일본에 자학사관이 팽배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여러 가지 자랑스런 업적을 이룩하였으며 일본 뿐 아니라 인류역사에도 공헌한 바가 많은 나라이다. 이처럼 찬란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일본이 한차례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의 역사에 자부심을 갖지 못하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오늘의 현실은 슬프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몇 년 전 나는 서울에서 일본의 젊은이들 몇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이들은 한국인들을 만나면 으레 몽둥이찜질을 당해야 하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도 한국인들이 때리지 않자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언제 때리는 것인지 묻기도 했다. 찬란하고 위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 일본의 국민이 왜 이웃나라에 와서, 그것도 얼마 전까지 일본 땅이었던 곳에 와서 이처럼 궁색한 처지에 놓여야 하는 것인가. 그들은 아마도 역사 교사들로부터 수없이 일본이 저지른 죄악상에 대해 교육을 받았을 것이며, 패전기념일마다 묵념을 하며 일본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오늘날 일본의 문제는 반성과 사죄가 없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청산이 너무 지나치다는 데 있다. 일본은 전후 독립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고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그 정신에서는 여전히 미국의 식민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얼마 전 만난 한 일본인 친구로부터 ‘강대국’ 일본인들이 입버릇처럼 ‘이렇게 작은 나라에서...’ 라고 말한다는 얘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일본은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같은 나라에 비하면 땅덩이도 좁고 인구도 적어 여러모로 너무 작은 나라인 것처럼 생각된다는 것이다. 겸손이라기보다는 자학에 가까운 이런 사고방식들은 모두 미국에 의해 강요된 식민사관과 자기비하 작업의 결과 생겨난 것이며, 일본이 경제뿐 아니라 정치 문화 군사적으로도 당당한 자주독립국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한 선결과제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최근 진행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바로잡기 운동은 잘못된 것을 제 자리에 돌려놓자는 움직임일 뿐 한국에서 말하는 우익의 준동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우익도 아니며 그저 일본을 사랑하는 애국자들일 뿐이다. 최근의 교과서 파동에서 한국 정부는 일본의 역사바로잡기 운동을 트집 잡아 분별없는 처신을 함으로써 국제적인 망신을 자초한 측면이 없지 않다. 이는 정부당국자들과 한국민 사이에 팽배해 있는 저열한 역사인식과 이기적인 사고방식에 연유한 것이며, 한국은 일본이 이 같은 무례한 언동에 정면대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를 근거로 스스로 옳다고 믿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일본의 유연한 대응은 정면에서 상대를 적대하지 못하는 일본적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며, 또한 오랜 세월동안 굳어져버린 패전국으로서의 자기비하 습성의 결과일 뿐이다. 일본의 의사표현 방식이 차라리 서양식이었다면 최소한 지금쯤 한일관계의 갈등은 그 실체라도 드러나 있을 것이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군대가 독일을 침공했을 때, 철학자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 이라는 연설을 통해 나폴레옹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독일 민족의 단결투쟁을 호소했다. 같은 시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나폴레옹의 군대가 프로이센의 낡은 관료 체계를 철저히 청산하고 혁명정신을 전파하는 것을 보면서, 나폴레옹이야말로 살아있는 세계정신이며 독일 국민은 오히려 프랑스 혁명군의 편에서 구체제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피히테는 알맹이 없는 민족주의를 중요시했지만 헤겔은 그 침략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가에 주목했다.

100년 전 조선의 상황에서 보면 피히테의 입장에 서 있던 사람들은 안중근이나 김구 같은 인물들이고 헤겔의 입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완용이나 김옥균, 박영효, 최남선, 이광수 등의 소위 친일파라고 불리는 인물일 것인데 오늘날 세계의 역사가들은 헤겔을 입장에 서서 나폴레옹을 위대한 프랑스 혁명의 수호자로 보고 그의 정복전쟁을 세계정신의 활동으로 해석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지만 프랑스 국민들은 그를 혁명의 진정한 수호자로 추앙해 마지않았으며 국민투표를 통해 절대다수가 나폴레옹의 황제즉위에 찬성했다. 나폴레옹 역시 이 같은 프랑스 민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정복 전쟁을 통해 전 유럽에 프랑스 혁명을 전파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정복전쟁이 무엇이나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나폴레옹이나 칭기즈칸의 정복전쟁은 헤겔의 표현대로 살아있는 세계정신의 활동인 것이며, 이들의 정복전쟁으로 인해 인류의 역사는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전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침략과 정복의 역사를 보는 데 있어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침략하여 정복하는 것은 악이라는 단선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과연 그 정복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것도 발명된 지 200년밖에 안 되는 정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며 현대 사회에서는 점차 폐기되어 가고 있는 구시대의 유물인 것이니 민족단위의 자주적인 존립이 정당하다는 논리도 최근 들어 유행하게 된 민족국가의 자기합리화 논리일 뿐 그것이 역사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같은 면에서 볼 때 19세기말 유럽인들의 식민지 정복에서는 정당성을 찾아보기 힘들겠으나 일본의 아시아 진출에는 분명 세계정신의 자기 구현이라는 측면이 존재한다 하겠다. 혁명을 통해 비유럽 지역 최초로 근대적인 사회제도를 구축하고 자율적으로 부르주아 혁명을 완성한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세계 역사에서 가히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후 일본의 동아시아 진출은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전쟁과 달리 착취와 수탈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혁명과 근대정신을 전파하겠다는 의도가 전제되어 있었으며, 이 같은 점에서 충분한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제국은 조선과 대만에서 민중을 억누르던 낡은 체제를 청산하고 근대적인 법의 통치를 구현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 통치 지역의 주민들은 문명의 세례를 받아 보다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 싱가포르와 일본 사이에 자유무역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일본 총리는 <확대 동아시아 공영권>을 주창했다는 뉴스도 들려온다. 두 가지 모두 그 의미가 작지 않은 사건이며, 바야흐로 동아시아에 협력과 공존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시사해주는 뉴스라 할 것이다. 같은 시각 한국에서는 세계적인 소프라노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멋진 영상으로 치장된 명성황후 뮤직비디오가 불티나게 팔려나가면서 극우 쇼비니즘의 광풍을 실감하게 해주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이 같은 파렴치한 역사왜곡과 반일 책동은 결국 한국이라는 나라를 동아시아의 외톨이 국가로 만들어갈 수 있으며, 언젠가는 아무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가 되어 역사의 상처로 남게 될 것이다. 이 책으로 인해 그러한 깨달음의 날이 하루라도 앞당겨질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단풍과 안개


하얀 나래들이
지상을 덮고
울긋 불긋 노을처럼
타들어가는 고운 단풍들이
아침을 맞이 하는 고녀.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 사이에도 단풍 치마
휘날리고 하얀 안개마저
손짓하는 고요의 시간

단풍 숲을 거닐면
뽀얀 안개속에서 들리는
새 소리 가을을 노래 하는 고녀

바람 한 점 없는
아침의 고요
소리 없는 함성처럼
느껴지는 하얀 치맛 자락
소리 없이 나부끼느뇨.

우수수 지는 나뭇가지
속속히 내려오는 하얀 천사들
울긋 불긋 노을 지는 단풍의
곡조들이 찬미 하지

바람의 그림자 갈대


바람의 그림자 갈대


강물도 목이 메여 
출렁거리는 쓸쓸한 달빛 아래 
하얀 머리털로 저 멀리 고독한 
별을 보고 한없이 날갯짓하는 갈대  

별빛도 차가운 메마른 가지에 
아프게 들러붙는 애환의 생채기 
흔들리다 세월 다 가는 덧없는 생

아무런 곡절도 모르고 물결치는 
칼바람 장단에 애달픈 악보를 
잡고서는 빈약한 몸매로 하늘을 
향해 푸른 동량의 꿈을 키웠던 
바람의 그림자여

비바람 몰아치는 캄캄한 밤에는 
멈출 수 없는 광란의 춤을 
춰야 하는 가벼움으로 비워도 
비워도 어쩔 수 없는 슬픔

그 누가 알기나 할까 
갈레갈레 파고드는 서러운곡조를

느린 바람에도 흔들리는
넋두리 하소연도 늘어놓을 
곳도 없는 공간에 꿈이 산화한 '
그리움만이 흐느끼며 빛바랜 
지난 세월을 더듬고 있다.

2013년 11월 10일 일요일

Our Lady of Fatima statue trapped in Samar


MANILA, Philippines - The international pilgrim statue of Our Lady of Fatima has been trapped in Eastern Samar, one of the areas battered by Super Typhoon Yolanda.
The image reportedly arrived in Dolores town last Thursday, where it was scheduled to stay overnight, according to CBCPNews, the official news service provider of the Catholic Bishops’ Conference of the Philippines.
CBCPNews said the icon was supposed to be transferred to Borongan last Friday but there was no confirmation if it arrived safely because of poor communication.
The icon should have been brought yesterday to the Archdiocese of Palo, Leyte which was also lashed by Yolanda.
The image, which came from Fatima, Portugal, on Sept. 16 was set to be brought to 41 archdioceses and dioceses all over the country until Dec. 18.

2013년 11월 8일 금요일

QM3 디젤 엔진만 출시한다는데 가격과 연비는 어떨까요??


뉴스 보니 르노삼성자동차가 재도약의 발판으로 디젤 엔진 차량 강화를 선택했다네요~~~
디젤 엔진이 유럽에서는 유지비나 출중한 연비와 파워로 인기를 얻고 있는데
아직 국내시장에서는 그렇게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어서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네요..

디젤 엔진 강화로 선택 받은 첫 번째 차종이 이번 르노삼성자동차에서 출시하는 QM3라는데
오직 디젤 엔진으로만 출시한다고 하더군요..




르노 디젤 엔진 기술이야 수년간 F1을 우승시켰던 엔진 공급책이니 말해봤자 손가락만 아프고..
이번에도 F1 상위 3위까지가 다 르노 엔진 머신이라는 것 아시죠??????

간단히 말하자면 가솔린 엔진과 비교하여 높은 연비와 더 좋은 파워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

특히 이번에 출시되는 디젤 QM3는 거의 유럽차에 가깝다고 보면 되서 연비도 엄청 잘 나올 것 같은데 얼마나 나올까요??

네이버에서 톡 하는 사람들 보면 23km 기대한다는 등 월등한 연비 예상이 많은데 20km 전후만 되어도 대박이지 않을까 싶네요..

하지만 무엇보다 가격에 대해서 제일 많이 얘기를 하더라고요~~
QM3 가격이 2,500만원 정도가 되지 않을까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수입이 되는 차이다 보니 뱀의 미니 컨트리맨과 비슷하거나 그것보다 살짝 낮은 3,000만원 정도가 아닐까 예상하는 분들도 있고..


(미니 컨트리맨 출고 가격)

갠적으로는 3,000만원 정도 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모르겠네요 ^^;;
아무래도 디젤 엔진이라는 강점과 유럽 출시 공장라인에서 수입을 해오는 형태이니 수입차 가격으로 예상을 해야할 것 같고, 미니 컨트리맨 출고 가격표를 보시면 소형 사이즈의 차량이라도 수입차이기에 3,000만대 아래로 출고 되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네요..ㅠ

이번에 폭스바겐에서 르노삼성자동차로 이사오신 부사장이 발표하기를 추후에는 부산공장에서 생산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만 된다면 2,700만원 정도도 조심스레 예상을 해보고요 ^^
근데 부산공장에서는 닛산 로그 생산을 하기로 했다는데 라인이 될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빨리 QM3 연비나 가격 등 기타 제원들이 공개되서 제대로 비교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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