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1일 월요일

상처뿐인 해방-일본의 패전과 한국


1945년 8월 15일 정오, 대일본제국의 천황 히로히토는 라디오를 통해 전 세계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선포했다. 이 항복선언은 이미 8월14일 오전 11시에 녹음되었다가 하루가 지난 뒤 라디오를 통해 발표된 것이다. 이미 두 차례의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일본의 패전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후항전을 준비하고 있던 수많은 군인들에게 이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선언이었다. 그 날 천황의 항복선언을 자신의 불충 탓으로 여긴 수많은 일본인들이 혹은 배를 가르거나 혹은 권총의 방아쇠를 당겨 자결했다. 그 수는 5천여 명에 달했다. 

일본열도와 전 세계의 일본인들이 이처럼 망국의 비탄에 젖어 있을 때,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과 일본군 점령지에서는 일제히 환호의 축포가 울려 퍼졌다. 조선반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집안에 감추어둔 태극기를 꺼내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기쁨의 만세를 불렀다. 그 날의 표정을 전후 세대들은 잘 알기 힘들지만, 그것은 아마도 지난 6월 25일 월드컵 8강전에서 한국팀이 승리하고 난 뒤의 분위기와 비슷했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실로 믿기지 않은 사건에 모두들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했으며, 그 날의 축제는 며칠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것이다.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한 10일 뒤인 1945년 7월 26일,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은 독일 베를린 근교의 포츠담에서 만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또한 포츠담 선언에서는 소련의 신속한 대일 개전을 촉구하고 제8항에서 무조건 항복 이후 ‘일본의 영토는 4대 섬과 부속도서로 제한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의 문제가 처음 거론된 것은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회담이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 소련의 스탈린 서기장은 1945년 2월4일부터 11일까지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회동하여 독일의 전후처리와 소련의 대일 개전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미국과 영국은 소련의 극동전선 참전을 촉구하였고 결국 소련은 몽골의 현상유지, 사할린과 쿠릴열도, 여순의 소련 귀속, 대련의 자유항화, 만주철도의 중소 공동운영, 만주에 대한 중국의 주권보장 등의 조건에 합의하고 대일 개전을 결의하게 되었다. 이 회담에서 루즈벨트는 비공식적으로 조선반도에 대해 미중소 3개국에 의한 20년 내지 30년 정도의 신탁통치를 제안하였는데, 이에 대해 스탈린은 신탁통치에 동의 하지만 기간은 더 짧아야 하며 외국군대의 주둔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후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외무장관 회담에서는 조선에 대한 임시정부 수립과 5년간의 신탁통치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선반도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의 선동으로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시위가 조직되었다. 초기 반탁시위는 좌우익 합작으로 진행되었으나 좌익은 곧 찬탁으로 입장을 선회하였다. 이때부터 좌우익, 찬탁파와 반탁파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조선에서 좌우익의 대립은 미소의 대립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조선의 신탁통치 문제는 냉전 대결이 격화되면서 결국 1947년 9월 폐기되고 말았다. 

이후 유엔총회는 조선에 대해 자유총선거를 실시해 정부를 구성한다는 결의를 했는데, 이에 따라 선거를 감시할 위원회가 파견되었으나 38도선 이북으로는 접근하지 못했다. 이때 미군정의 대리인 이승만은 ‘정읍선언’을 통해 가능한 지역에서만 총선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김구 등 통합 우선주의자들의 반발을 샀다. 어쨌든 이 선언 이후 남북은 각각 분단상태에서 정부를 구성하는 절차를 시작함으로써 분단이 고착되었다. 

이 같은 논의들은 별 중요성을 가진다 할 수 없다. 전후 조선의 처리 문제에서 중요한 점은 연합국들이 1868년 이후 취득된 일본의 영토를 몰수한다는 합의를 했다는 것인데, 이는 전후 국경설정에서 독일은 물론 다른 국가들도 전쟁 직전의 국경선으로 회귀한 것과 비교해보면 일본에 대해서는 매우 차별적인 조치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80년 전의 국경선으로 회귀한다는 결정은 아무리 패전국이라지만 국제적인 전후처리 관행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먼저 북해도를 점령했고 이후 오키나와 등 일본열도 남단의 섬들을 점령했으며, 대만, 사할린과 쿠릴열도, 조선반도, 만주 등을 통합하여 일본의 영토는 점차 확대되어 왔다. 오키나와에 대해서는 패전 이후 괌, 사이판과 같은 미국령으로 유지되어 왔으나 미국은 1976년 오키나와를 반환하였으며 북해도는 처음부터 분단시키지 않았다. 

1931년 이후 사실상 일본의 영토가 된 만주에 대해서는 이미 국제연합에서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패전 이후 일본은 만주를 비롯해 1930년대 이후 취득한 해외 영토를 포기하는 데 별다른 이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국제적으로 승인 받고 정당한 절차에 의해 일본 영토에 통합된 오키나와를 비롯해 대만과 사할린, 조선, 쿠릴열도, 남양군도(마이크로네시아) 등의 영토에 대해서는 패전을 이유로 이들을 일본으로부터 분단시킨다는 발상은 정당성이 결여된 조치로서, 약자를 무시하는 승전국들의 또 다른 침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연합국과의 합의에 따라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일-소 불가침조약을 스스로 폐기하였다. 유럽에서 극동지역으로 이동한 소련군은 1945년 8월9일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을 시작했다. 우세한 소련군의 화력 앞에서 일본의 극동군은 차례로 궤멸하였으며, 소련군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뒤에도 계속 진격하여 8월26일에는 조선반도 북부의 평양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8월 10일 미국과 소련은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각각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기로 약속한 상태였으므로, 소련군은 38선에서 진격을 멈추었다. 1945년 9월 8일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 제24군단이 인천에 상륙했으며 9일에는 서울로 들어와 조선총독부를 점령하였고 곧이어 북위 38도선 이남 지역에 대한 군정을 시작했다. 

인민은 약하므로 언제나 승리자의 편이다. 오랜 세월동안 일본에 동화되어 일본인으로 살아왔던 조선인들은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마치 자신들이 일본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행세하기 시작했으며, 이 같은 추세는 전염병처럼 번져나가 곧 모든 사람들이 숨겨진 항일투사로서 일본의 통치에 저항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세상이 바뀐’ 것이다. 곧이어 소련군과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을 시작하자 조선인들은 소련국기와 성조기(미국의 국기)를 들고 나와 이들을 환영하였으나, 이들 승전국의 군대는 총알세례와 약탈, 강간으로 화답하였다. 

열도에 진주한 미군과는 달리 조선반도를 점령한 소련군과 미군은 대륙에 붙어있는 일본 영토를 점령하고 일본군을 무장해제하는 사명을 띠고 있었으므로, 대단히 잔혹하고 야만적이었다. 그들은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할 수 없었으며, 이곳이 조선이라는 인식도 없었다. 그들에게 조선반도는 단지 일본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승리에 대한 도취감으로 곧 복수를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건물을 파괴했고 부녀자를 강간했다. 특히 북한 지역에서는 소련군의 약탈과 강간이 빈번했던 탓에 여자들은 바깥출입을 하지 않게 되었으며, 길거리에 여자가 사라지자 소련군은 가택수색을 하여 강간을 하였다. 이때 조선인들은 고쟁이라는 것을 만들어 여자들에게 입히게 되었는데, 이는 치마 안쪽에 입는 짧은 바지로서 요즘의 거들과 같은 의복이다. 하지만 고쟁이도 집안까지 쳐들어와 어린 여자들을 겁탈하는 점령군의 강간을 막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후 한반도는 공산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에 의해 체제경쟁의 전시장으로 변해갔다. 남한과 북한의 정권을 장악한 미,소의 대리인들은 정권을 유지하고 그들의 종주국으로부터 환심을 사기 위해 경쟁 체제에 대한 극단적인 적개심을 갖도록 인민을 세뇌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50년 이후 3년간 참혹한 전쟁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본격적인 전쟁이 있기 이전에도 남한은 사실상 좌우익의 전쟁터였다. 이념대립으로 인해 수많은 대량 학살사건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수십만명의 선량한 주민들이 죽어갔다. 


[ 반일 세력의 정권 장악 ]
전후 한반도는 독일과 함께 이데올로기 대립의 상징으로 육성되었지만 남북 모두 반일세력에 의해 정권이 장악되었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었다. 남한에서는 정부 수립 이후 반공이 가장 중요한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했는데, 동시에 반일도 그에 못지 않은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종전 이전 이들 독립운동 세력은 주로 해외에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을 업으로 삼아 생활했던 일종의 ‘독립업자’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그 중에는 일부 독립이 조선민족에게 지고의 선이라고 믿고 헌신한 지식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독립운동을 명분으로 삼아 일하지 않고 살아가거나 인민의 재산을 노략질했던 룸펜, 혹은 도적떼에 가까운 집단이었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쫓기거나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만 하면 모두 독립운동가로 행세할 수 있었던 당시 시대상황을 잘 이용하였기 때문에 도적떼와 독립군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았다. 

남조선에서는 정부수립 이후 이 독립운동 룸펜 집단이 귀국해 정권을 장악한 뒤 친일파를 탄압했다. 이 때문에 남조선에서는 누구나 일제시대에 총독부에 저항하거나 최소한 협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분위기가 점차 강화되면서 반일은 한국의 중요한 통치이데올로기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일본통치 시대의 모든 제도적 인적 유산을 청산해버린 북조선과 달리 한국을 점령한 미군정은 일본통치의 유산을 활용하려 하였기 때문에, 정부수립 이후에도 친일파들은 반공운동에 적극 협력하는 전략을 선택함으로써 한국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일본통치 기간 중 일본은 대륙과 가까운 북조선 지역을 주요 산업기지로 육성했다. 이 때문에 북조선은 종전 이후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출발하여 30년 동안 남한에 대한 국력의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한은 일본통치의 유산 가운데 많은 부분을 계승하였고 또한 1965년 뒤늦게나마 일본과 국교를 수립함으로서 많은 경제적인 지원을 받은 탓에 1970년대 이후 체제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 패전의 가장 큰 피해자 ]
그러나 돌이켜보면,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국이 됨으로써 가장 큰 피해자가 된 것은 현재의 일본인들이 아니라 한반도에 살고 있던 조선민족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오늘날 전제적인 독재체제 아래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북조선은 조선 민족 가운데서도 패전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하겠다. 종전 당시 조선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동북아시아 지역의 광범위한 지역으로 흩어졌다. 이들은 주요 5개의 그룹으로 구분되는데, 남조선주민, 북조선주민, 재일 조선인, 중국의 조선족, 소련의 까레이스키(Corean의 러시아어 발음) 등이다. 

종전 이후의 삶을 돌이켜보면 이 가운데 일본에 남아있던 조선인들이 가장 사정이 나았고, 그 다음으로는 남조선 주민, 중국의 조선족, 러시아의 까레이스키, 북조선 주민의 순으로 불행한 삶을 영위했다. 이는 오늘날 역사를 돌이켜 일본이 패전하지 않았거나 혹은 패전 이후에라도 조선이 일본과 분단되지 않았을 경우를 가정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전후 한국인들은 일본통치 시대 모든 조선인들이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고 우리는 전쟁을 통해 스스로 독립을 이루었다고 조작된 역사를 학습했다. 그 결과 많은 한국인들에게 일본통치 시대는 그저 잠시 강대한 침략자에게 눌려있던 기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분단된 것이 민족의 미래에 얼마나 엄청난 불행을 가져왔는지, 혹은 아직 남북한이 일본의 일부였다면 지금보다 얼마나 더 발전된 나라가 되었을 것인지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올해 2002년 초 개봉된 한일합작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젊은 세대들에게 그동안 생각지 못했던 시각에서 한일관계를 조명할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나는 금년 초 어느 모임에서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행복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20대 여성을 만난 적이 있는데, 아마도 이 영화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인들 사이에서 이같은 아이디어를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복거일이라는 한국인 소설가의 1987년작 <비명을 찾아서>라는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인데, 시대 설정이 다소 참신할 뿐 소설 자체의 스토리는 유치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이 소설은 어느 일본인이 조선북부에서 과거로 여행할 수 있는 유물을 발견한 뒤 그것을 이용해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이토의 암살을 저지함으로써 역사가 바뀌게 된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그 결과 일본은 2차 대전에서 승전국이 되고 2009년 서울은 일본의 제3대 도시로서 찬란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군 不令鮮人들이 이 보물을 되찾아 다시 역사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한국은 독립을 이루게 된다는 스토리다. 이 영화는 올해 초 한국에서 많은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아직 우리가 일본이라면..’ 이라는 다소 획기적인 발상이 생겨난 것은 어디까지나 이 영화의 영향이라고 하겠다. 

2002년 초, 당시 한국의 경제 부총리인 진념씨는 수십년동안 혼란 속에 있는 교육제도에 관해 언급하면서, “한국의 교육제도는 아직 일제시대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해 이를 두고 소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일제시대가 지옥과도 같았고 해방 후에는 힘들긴 했지만 최소한 일제시대보다는 나은 조건에서 출발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의 전후세대들에게 전전세대인 진념씨의 발언은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교육제도 뿐 아니라 관료시스템 전체가 아직 일제시대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최근 이루어진 합병 초기 조선토지조사사업에 관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당시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총독부의 <임시토지조사국>에 의해 8년 동안 실시된 방대한 조사사업 기간동안 농촌주민들이 물리적으로 저항한 사례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연구자들은 “이 작업을 수행한 총독부의 관료들은 실지조사實地調査나 분쟁지 처리에서 엄정한 공정성에 입각해 깨끗하고 강력하며 효율적으로 임했다”고 총독부 관료들의 청렴과 봉사정신을 극찬하고 있다. 관료들의 이같은 공무집행의 자세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눈씻고 찾아봐도 발견하기 힘든 것일 뿐 아니라, 오늘날 한국에서 그토록 엄청난 이권이 결부된 작업을 소수의 공무원들에게 맡겨 놓는다면 시비와 분쟁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고 아마도 8년이 아니라 80년이 지나도 마무리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김영삼 정부는 지난 1993년 서울-부산을 잇는 경부고속철도 건설사업을 시작하면서, 건설비 5조원으로 2001년까지 완공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뀐 뒤 조사해본 결과 5년 동안 공사는 거의 진행된 것이 없고 사업비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이 사업은 다시 총 사업비 19조원으로 2010년 완공하는 것으로 수정되었으나, 그나마 이마저도 절반의 노선은 기존 철로를 보수해 사용하는 등 원래의 계획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수정된 계획도 그대로 진행될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인가. 그동안의 계획은 정부 관료들이 국민의 세금을 도둑질하기 위해 거짓으로 계획을 작성해 국회의 승인을 받은 뒤, 엄청난 뇌물을 받고 부실한 업체들에 시공을 맡겨 낭비해버린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부패한 관료제도는 국가운영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낭비와 비능률을 초래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적인 연구기관들에 따르면 한국의 관료제도는 제3세계 국가치고는 놀라울만큼 부패가 적고 그것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니, 저개발국이 스스로의 관료 시스템에 의존해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과제인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은 이처럼 아직 교육제도와 관료시스템 등에서는 일제시대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으나, 경제구조 등에 있어서는 이미 일본통치시대 전성기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이다. 산업구조 면에서 보면 1940년대 초반 조선 지역은 농업생산 43%, 광공업생산 25%, 기타 32%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무역의존도는 69% 였다. 이 당시 조선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공업국으로 변모해 있었으며 세계 최고 수준의 무역의존도를 가진 ‘수출지향 경제발전’ 전략이 추진되고 있었다. 이같은 산업구조와 무역의존도에 기초해 고찰해볼 때, 남한 경제가 1940년대 초반의 수준을 회복한 것은 아마도 1980년대 초반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이 문제는 차후 보다 더 깊은 조사연구가 필요할 것이나 현재로서는 그 정도로 유추할 수 있다. 

1950년대 말에 이미 1940년대 초반의 경제력을 회복한 일본과 비교해볼 때, 이는 25년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구일본제국의 외지 가운데 대만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우등생인 남한이 무슨 이유로 40년이 지난 다음에야 일제시대의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인가. 전쟁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었던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이니 전쟁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론은 자명하다. 종전당시 조선에는 약 70만 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후 승전국들의 결정에 따라 조선에 있는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채 일본으로 추방되었다. 이들은 합병 이후 일본에서 이주한 공무원, 교사, 경찰, 사업가, 농민, 노동자, 기술자로서 대부분 우수한 인력이었다. 즉 낙후된 조선은 40년 동안 이들의 힘에 의해 고도성장을 지속하며 수출형 공업국으로 발전하였으나, 패전 이후 이들이 한꺼번에 추방당하고 그 자리를 해외에서 귀국한 소위 ‘독립운동가’ 룸펜 집단이 차지하는 지배층의 교체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조선은 다시 수십년 전의 사회로 후퇴하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조선은 1940년대 초 국내 총생산의 69%라는 경이적인 무역의존 체질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물론 대부분 내지(일본)와의 무역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정부수립 이후 청구권 문제로 20년 동안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절대적인 수출시장을 상실하고 말았다. 오늘날 한해 3500억 달러의 교역을 하는 한국경제가 어느 날 갑자기 교역액이 350억 달러로 줄어든다면 파멸상태가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일본의 패전 이후 모국을 잃어버린 남한 경제는 이처럼 비참한 파멸을 경험했던 것이다. 


[ 해방인가 ]
이같은 고찰에 기초해 볼 때, 한국인들이 종전을 ‘해방’이라고 말하고 8월 15일을 빛을 다시 찾은 날이라는 뜻의 ‘광복절’로 경축하는 것은 실소를 자아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해방’으로 인해 우리는 과연 자유를 찾고 행복했는가? 그 날 이후 조선인들에게는 분단과 좌우대립, 끝없는 학살과 전쟁, 배고픔과 눈물만이 있었을 뿐이다. 부유하고 헌신적인 부모의 보호 아래 행복하게 자라던 어린이가 채 성장하기도 전에 고아 신세로 전락해버린 것이 전후 한국의 모습이다. 돌이켜보면 그 기나긴 지옥 같은 세월을 견디고 오늘을 이루어낸 한국인들이 경이로운 존재로 여겨질 정도이다.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한국이 얻은 것은 분단과 고통, 기아와 죽음뿐이었다. 잃은 것은 70만의 일본인과 수출시장, 그리고 무엇보다 고귀한 자유와 존엄이었다. 오늘날 한국에는 18,000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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