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1일 월요일

쇼비니즘의 광풍을 뚫고

조선과 대만은 100년 전 근대화가 시작되는 중요한 기간에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날 두 나라가 일본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대만은 정부와 민간 모두 일본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반면, 한국은 지속적인 반일교육의 영향으로 정부나 민간 차원 모두 일본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양국이 비슷한 기간동안 비슷한 성격의 일본 통치를 거쳤음에도 이 같은 차이가 발생한 까닭을 물어보면, 대체로 대만에 대한 일본통치가 조선에 비해 15년 더 길었다는 것과 대만에는 일본 이전에 독자적인 왕조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대답을 쉽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남북한이 보이고 있는 일본에 대한 유별난 적대적인 태도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북한의 경우 오랫동안 항일 독립운동의 전설로 알려진 조선혁명군 세력이 집권했기 때문에 반일정책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독립 이후 친일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남한에서는 왜 이토록 반일감정이 심각한 것인가.

보통의 한국인들이 지닌 반일감정의 기저에는 과거 일제통치 기간동안 조선이 많은 손해를 입었다는 피해의식이 깔려 있는 듯한데, 같은 기간 동안 일본인들은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처럼 같은 일에 대해 지니고 있는 지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깊은 감정의 골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한국인 사이에 퍼져있는 반일감정의 근원에는 먼저 역사학자들에 의한 자의적인 자료 조작과 왜곡이 자리하고 있고, 이에 근거한 강력한 반일 교육과 이데올로기 책동이 깔려 있다.

1905년 이후 일본에게 있어 조선은 식민지라기보다는 확장된 일본의 영토라는 의미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과 대만을 통치함에 있어 대체로 본토인과 같은 대우를 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조선에 대해서는 대륙에 연결되어 있다는 지정학적인 중요성 때문에 오히려 본토보다 더 많은 투자와 산업시설을 유치하는 등 유리한 대우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유럽 열강들에게 식민지라는 것이 멀리 떨어진 곳에 농장을 소유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었다면 일본에 있어 조선과 대만은 옆의 점포를 사들여 가게를 확장하는 것과 비슷한 행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의 반일감정은 이 점에 대한 오해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듯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서울에 거주하면서 멀리 떨어진 호주나 뉴질랜드에 농장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는 현지에 일정한 돈을 투자해 수익을 발생시킴으로써 그 과실을 따먹는 일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거주지이자 일터인 상점을 경영하는 가난한 상인이 힘들게 옆에 있는 가게를 인수하게 되었다면, 그는 열성을 다해 새로 생긴 가게를 단장하고 기존 점포와 통합해 시너지 효과를 얻는 일에 주력할 것이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 대만과 조선을 합병한 일본의 처지는 바로 이런 구멍가게 주인과 비슷했다고 하겠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을 개발하고 발전시킨 일을 두고 돼지를 키워 잡아먹기 위한 것이었다거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하면서 우리 스스로 그 의미를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개발하는 데 있어 혹 장기적인 수탈이나 병참기지 확보하는 목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며, 조선에 와서 힘들게 농토를 개량하고 사업을 일으킨 일본인들 가운데에는 조선에 근대문명을 전파하고 조선을 신속히 개발하여 일본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동화하겠다는 좋은 의도를 지닌 사람들도 많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과거 일본이 조선에 행한 선의의 시혜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는 일은 사라질 것이다. 즉 한국인들에게 존재하는 반일감정은 한국 정부의 의도적인 역사왜곡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라고 생각하며, 이는 또한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우리는 왜곡된 교육으로 인해 흔히 을사조약과 한일합병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이와 전혀 다르다. 일본과 합병하는 것만이 조선의 문명개화 및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방안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당시 조선의 뜻 있는 개혁세력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도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같은 강력한 여론에 따라 일본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접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가장 유력한 증거가 바로 1904년 결성된 일진회다. 이 단체는 동학과 독립협회가 연합하여 조선 왕조 및 수구 반동세력을 무너뜨리고 일본과 연대하여 문명개화라는 조선혁명의 시대적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 결성된,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인 대중정치조직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은 한국 사회에서 철저히 은폐되어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일진회에 대해 일본이 소수 친일파들을 규합하여 결성한 어용 사이비 단체 정도로 왜곡하여 교육하고 있다.

1904년 초 벌어졌던 러일전쟁에서 동학 교도들은 교주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5만여 명의 병력이 참전하여 일본과 함께 싸웠다. 이후 동학 교도와 보부상들은 진보회를 결성하여 첫해에만 전국에서 38만의 조직원을 확보하였으며, 이후 이름을 일진회(一進會)로 바꾸고 독립협회 계열의 개화인사들과 연합하여 한일 합병과 개화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 때 100만이 넘는 방대한 조직을 갖춘 이들은 스스로 검은 옷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잘라 외모에서 쉽게 구분이 되었기 때문에 보수 반동세력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일진회는 결성 이후 일본과의 합병을 추진하였고 그로 인해 반혁명 세력과의 내전에서 수많은 일진회원들이 살해되고 건물이 파괴되는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오늘날 한국이 일진회를 친일단체라 하여 비난하고 반동 폭도들을 의병이라 칭송하는 것은 역사를 거꾸로 해석하는 실수라 할 것이다.

스스로 을사년 신협약의 체결을 주도하고 조선의 초대 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는 정치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일본에 부담이 되는 조선 합병을 결코 원하지 않았으며 이는 다만 일진회 등 조선의 혁명세력이 청원하던 바였으나, 안중근의 이토 살해사건으로 인해 일본의 여론은 급속히 합병으로 기울게 되었으니 안중근은 그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애국을 한 셈이 되었다. 일진회는 조선 역사상 최대의 혁명 조직이자 군사조직이었으며 조선 총독부조차도 그 힘을 두려워하여 합병 이후 강제 해산하였을 정도로 강력했던 조선의 정치조직이었다.

일본의 통치로 인해 조선은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30년 남짓한 기간동안 천만명도 안되던 인구는 2500만으로 늘었고 평균수명은 24세에서 45세로 늘었으며, 미개한 농업사회이던 조선은 단시일 내에 근대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변모하였다. 본토에서는 우수한 교사들이 부임해 조선인들을 교육하였고 해마다 일본 정부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유입되어 각종 사회기반시설이 건설되었다. 1920년대에는 일본에 대한 쌀 수출로 조선에는 갑부들이 속출하였으며 그 바탕 위에 소위 ‘민족자본’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다. 1920년대 조선의 문예부흥은 일본과 정확히 같은 시기에 시작된 것이며 오늘날 이광수와 최남선으로부터 시작해 김동인 이효석 김영랑 윤동주 홍난파 등 우리가 기억하는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등장한 인물들이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이 같은 공헌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으며, 간혹 인정하는 사람들조차 그것이 일본이라는 외세에 의해 이루어진 타율의 성과물이라는 이유로 그 의미를 평가절하하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조선은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유교 근본주의 사회로서, 그 유교적 계율의 정교함과 엄격함은 오늘날 이슬람 근본주의 따위는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못할 정도라 하겠다. 따라서 오늘날 회교 근본주의가 이슬람 사회에 미치고 있는 악영향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인식이 미치는 사람이라면 조선의 유교근본주의가 외세의 영향이 배제된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소멸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20세기 초 외세에 의한 개혁, 그것도 일제에 의한 철저한 청산 작업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한반도는 전 세계에서 가장 미개한 지역 가운데 하나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제시대가 우리에게 행운이었고 축복이었을지언정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불행한 과거일 수는 없다.

우리는 전후 한반도가 두개의 나라로 분단되었지만 일본은 운 좋게도 분단을 피했다고 생각해왔다. 통일을 말할 때에도 남북한의 통일만을 얘기할 뿐 일본이나 대만과의 통일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패전 후 일본제국이 5개의 지역으로 분할 점령된 것이지 남북한이 분단된 것은 아니다. 승전국들에게 한반도는 일본의 영토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고, 이들은 일본제국을 남한과 북한, 대만, 사할린, 일본열도의 5개 지역으로 분리하여 각각 점령한 것이다. 이 가운데 사할린만이 아직도 러시아의 영토로 되어 있고 나머지 4개 지역은 독립국이 되었다. 일본제국이 메이지 유신 이후 획득한 영토를 분리한다는 것은 승전국들의 논리였지 우리가 선택했던 것은 아니며, 물론 일본이 원했던 것도 아니므로 이는 분명 강제 분단이라 하겠다.

일본은 조선과의 분단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일본은 전후 독립과정에서 사할린과 대만은 포기하더라도 최소한 한반도와는 통일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백방 노력하였지만 힘없는 패전국의 주장은 먹혀들지 않았고 분단은 고정되어 버렸다. 미국과 소련은 각각 남북한을 분할 점령한 뒤 자신들의 꼭두각시를 대리통치인으로 앉혀 위성국가로 삼았다. 그러므로 한반도 분단의 원흉, 더 근원적으로 구일본 분단의 원흉은 멀쩡한 나라를 패전국이라 하여 강제로 갈라놓은 미국 소련인 것이지 분단을 막아보려 애쓴 일본은 아니라 하겠다.

나는 어린 시절 <도라 도라 도라> 라는 전쟁영화를 매우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뭐가 그리 재미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같은 영화를 두어 번은 본 것 같다. 그 영화에서 일본은 하와이의 평화스런 미국인들을 기습 공격한 비겁하고 못된 나라였고, 나는 일본군인들을 저주하면서 제2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미국이 멋지게 일본군을 때려잡을 것이라던 도라도라 2탄은 몇 년을 손꼽아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최근 <진주만>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일본군을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미 60년 전에 엄청난 규모의 항모전단을 이끌고 지구 반대편까지 출정해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박살내버린 일본이라는 나라의 위대함에 나는 감동과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는 우리도 일본이었으며 우리 조상들도 일본인으로서 전쟁에 참가하고 응원했을 것이 분명한데 왜 오늘날 한국인들은 일본과 미국의 전쟁에서 미국을 응원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현실은 일본제국의 영토였던 남한과 일본이 오늘날까지 미국에 점령당하고 있기 때문에 강요당한 멍에일 뿐, 분명 바람직하거나 당연하게 생각할 일은 아닌 것이다.

오늘날 한국 정부에 의해 시행되고 있는 체계적인 반일교육과 그 결과로 생겨난 반일감정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 분단 이후 남한을 장악한 정치집단은 체제유지를 위해 북한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증오집단을 조작해 내었으며, 북한에 대한 증오가 어느 정도 수그러진 오늘날에 와서는 일본에 대한 이데올로기 조작과 반일 책동 작업은 이를 이용하는 세력의 입장에서 그 필요성이 더 커져가고 있다. 그러나 결국 반일 책동은 한국이라는 국가에게 백해무익한 자해행위에 불과하며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의 정당한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쓸어내야 할 구시대의 유산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한국은 전 세계를 통틀어 반일감정이 존재하는 유일한 국가일 것이다. 정작 일본과 전쟁을 치른 미국인들은 일본을 아시아에서 가장 우호적인 국가이자 중요한 경제파트너로 여기고 있으며,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일본에 매우 호의적이다. 또한 과거 51년 간 일제시대를 경험한 대만에서도 반일감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간혹 한국과 한 목소리를 내는 중국의 경우 공식적인 태도는 공산당의 입장일 뿐이며 중국인들에게서 한국에서와 같은 반일감정을 발견하기는 매우 힘들다. 사실 많은 중국인들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며, 한국이나 일본을 중국의 일개 성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몇해전 동아일보와 아사히 신문은 합동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그 결과를 보면 한국인 가운데에는 일본을 싫어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의 3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 일본인들은 한국이 좋다는 응답이 더 많았다. 양국 간의 이런 이상한 감정관계는 국외자가 보기에 첫째, 일본이 한국에 큰 잘못을 저질렀거나 둘째, 한국인들이 비정상적인 반일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두 가지 해석을 낳을 수 있을 것인데, 아마도 두 번째 평가를 내리는 국외자들이 더 많을 것이다.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무례하다는 것은 이미 국제사회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아마도 한국의 유별난 반일감정은 국제사회에서 두고두고 한국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게 될 것이다. 국내에서는 이 같은 분위기를 짐작조차 하기 힘들지만 막상 해외에 나가보면 한국이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우리는 한일관계, 특히 우리가 일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전면적인 반성에 착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작업은 과거사에 대한 냉철한 평가 없이는 성공하기 힘들다. 여기서 나는 개항 이후 한일합병까지의 시기를 조선의 부르주아 혁명기로 설정하고 근대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개항 이후 조선의 당면과제가 부르주아 혁명이었다면 일본은 대체로 혁명의 든든한 지원군이었으며 때로는 주도적으로 개입해 조선의 개혁을 추진한 우호적인 외세로 보았다.

조선의 부르주아 혁명은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을 한 축으로 하고 개화당과 독립협회를 창설했던 지식인 그룹, 동학 민중세력 등 3개의 축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 3대 세력은 시대에 따라 대결하거나 연합하면서 조선혁명을 이끌어왔으며, 한일합병은 그 혁명의 바람직한 귀결이라고 보았다. 이 같은 시각으로 개항기의 조선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혁명은 비록 다소 왜곡된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나 결코 무력하게 외세에 의해 휘둘린 피침의 역사가 아니라 조선 내부 혁명세력의 자주적인 의지로 진행된 주체적인 변혁의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과 조선의 혁명가들은 조선왕실과 그에 빌붙은 수구외세와 대항하면서 30년 동안 끈질기게 부르주아 혁명을 추진했으며, 조선의 문명개화는 이들의 피땀으로 얻어진 성과물인 것이다.

몇해전 여름 한국방송공사에서는 일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두 차례 방영한 바 있는데, 나는 거기에서 오늘날 일본에 자학사관이 팽배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여러 가지 자랑스런 업적을 이룩하였으며 일본 뿐 아니라 인류역사에도 공헌한 바가 많은 나라이다. 이처럼 찬란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일본이 한차례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의 역사에 자부심을 갖지 못하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오늘의 현실은 슬프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몇 년 전 나는 서울에서 일본의 젊은이들 몇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이들은 한국인들을 만나면 으레 몽둥이찜질을 당해야 하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도 한국인들이 때리지 않자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언제 때리는 것인지 묻기도 했다. 찬란하고 위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 일본의 국민이 왜 이웃나라에 와서, 그것도 얼마 전까지 일본 땅이었던 곳에 와서 이처럼 궁색한 처지에 놓여야 하는 것인가. 그들은 아마도 역사 교사들로부터 수없이 일본이 저지른 죄악상에 대해 교육을 받았을 것이며, 패전기념일마다 묵념을 하며 일본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오늘날 일본의 문제는 반성과 사죄가 없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청산이 너무 지나치다는 데 있다. 일본은 전후 독립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고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그 정신에서는 여전히 미국의 식민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얼마 전 만난 한 일본인 친구로부터 ‘강대국’ 일본인들이 입버릇처럼 ‘이렇게 작은 나라에서...’ 라고 말한다는 얘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일본은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같은 나라에 비하면 땅덩이도 좁고 인구도 적어 여러모로 너무 작은 나라인 것처럼 생각된다는 것이다. 겸손이라기보다는 자학에 가까운 이런 사고방식들은 모두 미국에 의해 강요된 식민사관과 자기비하 작업의 결과 생겨난 것이며, 일본이 경제뿐 아니라 정치 문화 군사적으로도 당당한 자주독립국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한 선결과제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최근 진행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바로잡기 운동은 잘못된 것을 제 자리에 돌려놓자는 움직임일 뿐 한국에서 말하는 우익의 준동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우익도 아니며 그저 일본을 사랑하는 애국자들일 뿐이다. 최근의 교과서 파동에서 한국 정부는 일본의 역사바로잡기 운동을 트집 잡아 분별없는 처신을 함으로써 국제적인 망신을 자초한 측면이 없지 않다. 이는 정부당국자들과 한국민 사이에 팽배해 있는 저열한 역사인식과 이기적인 사고방식에 연유한 것이며, 한국은 일본이 이 같은 무례한 언동에 정면대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를 근거로 스스로 옳다고 믿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일본의 유연한 대응은 정면에서 상대를 적대하지 못하는 일본적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며, 또한 오랜 세월동안 굳어져버린 패전국으로서의 자기비하 습성의 결과일 뿐이다. 일본의 의사표현 방식이 차라리 서양식이었다면 최소한 지금쯤 한일관계의 갈등은 그 실체라도 드러나 있을 것이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군대가 독일을 침공했을 때, 철학자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 이라는 연설을 통해 나폴레옹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독일 민족의 단결투쟁을 호소했다. 같은 시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나폴레옹의 군대가 프로이센의 낡은 관료 체계를 철저히 청산하고 혁명정신을 전파하는 것을 보면서, 나폴레옹이야말로 살아있는 세계정신이며 독일 국민은 오히려 프랑스 혁명군의 편에서 구체제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피히테는 알맹이 없는 민족주의를 중요시했지만 헤겔은 그 침략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가에 주목했다.

100년 전 조선의 상황에서 보면 피히테의 입장에 서 있던 사람들은 안중근이나 김구 같은 인물들이고 헤겔의 입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완용이나 김옥균, 박영효, 최남선, 이광수 등의 소위 친일파라고 불리는 인물일 것인데 오늘날 세계의 역사가들은 헤겔을 입장에 서서 나폴레옹을 위대한 프랑스 혁명의 수호자로 보고 그의 정복전쟁을 세계정신의 활동으로 해석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지만 프랑스 국민들은 그를 혁명의 진정한 수호자로 추앙해 마지않았으며 국민투표를 통해 절대다수가 나폴레옹의 황제즉위에 찬성했다. 나폴레옹 역시 이 같은 프랑스 민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정복 전쟁을 통해 전 유럽에 프랑스 혁명을 전파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정복전쟁이 무엇이나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나폴레옹이나 칭기즈칸의 정복전쟁은 헤겔의 표현대로 살아있는 세계정신의 활동인 것이며, 이들의 정복전쟁으로 인해 인류의 역사는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전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침략과 정복의 역사를 보는 데 있어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침략하여 정복하는 것은 악이라는 단선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과연 그 정복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것도 발명된 지 200년밖에 안 되는 정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며 현대 사회에서는 점차 폐기되어 가고 있는 구시대의 유물인 것이니 민족단위의 자주적인 존립이 정당하다는 논리도 최근 들어 유행하게 된 민족국가의 자기합리화 논리일 뿐 그것이 역사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같은 면에서 볼 때 19세기말 유럽인들의 식민지 정복에서는 정당성을 찾아보기 힘들겠으나 일본의 아시아 진출에는 분명 세계정신의 자기 구현이라는 측면이 존재한다 하겠다. 혁명을 통해 비유럽 지역 최초로 근대적인 사회제도를 구축하고 자율적으로 부르주아 혁명을 완성한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세계 역사에서 가히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후 일본의 동아시아 진출은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전쟁과 달리 착취와 수탈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혁명과 근대정신을 전파하겠다는 의도가 전제되어 있었으며, 이 같은 점에서 충분한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제국은 조선과 대만에서 민중을 억누르던 낡은 체제를 청산하고 근대적인 법의 통치를 구현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 통치 지역의 주민들은 문명의 세례를 받아 보다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 싱가포르와 일본 사이에 자유무역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일본 총리는 <확대 동아시아 공영권>을 주창했다는 뉴스도 들려온다. 두 가지 모두 그 의미가 작지 않은 사건이며, 바야흐로 동아시아에 협력과 공존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시사해주는 뉴스라 할 것이다. 같은 시각 한국에서는 세계적인 소프라노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멋진 영상으로 치장된 명성황후 뮤직비디오가 불티나게 팔려나가면서 극우 쇼비니즘의 광풍을 실감하게 해주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이 같은 파렴치한 역사왜곡과 반일 책동은 결국 한국이라는 나라를 동아시아의 외톨이 국가로 만들어갈 수 있으며, 언젠가는 아무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가 되어 역사의 상처로 남게 될 것이다. 이 책으로 인해 그러한 깨달음의 날이 하루라도 앞당겨질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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